<붕당의 출현과 발전>
-선조가 즉위하면서 척신 정치 잔재를 청산할 목적에서 사림 세력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
[사림의 분리]
=>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두고 사림 간 갈등 야기
-기성 사림: 명종 때부터 계속 정권 참여해 옴. 척신 정치 개혁에 소극적 (훗날 서인)
-신진 사림: 선조 대 새롭게 정계에 등장. 사림 정치의 적극적 실현을 강력하게 주장 (훗날 동인)
[붕당 형성]
-사림은 '붕'을 군자의 결합으로 '당'을 소인이 서로 모인 것이라 하여 '군자유붕론'의 논리를 제시하며
훈구파를 '소인의 당'으로 비판
- 신진 사림의 지지를 받던 '김효원'과 왕실의 외척이면서 기성 사림의 '신의겸'이 '이조 전랑직'을 놓고 대립
=>이 계기로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 형성
(서인은 치인에 역점을 두고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 안민 추구)
(동인은 선비들의 수기에 역점을 두어 지배층의 도덕성 제고 중시)
* 이조전랑직 - 정5품 이조정랑과 정6품 이조좌랑을 함께 부르는 말 - 젊고 명망있는 문신 중에서 임명 -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까지 순조롭게 승진가능한 요직 - 품계는 높은편은 아닌데 3품 이하 문관의 천거와 3사 청요직의 선발권, 후임 전랑의 추천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짐 (이 때문에 3사의 언론 활동을 은연중에 주도 가능, 정치적 역할도 큼, 그래서 길에서 고위관리도 말에서 내려 인사할 정도) - 이조전랑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될 정도 => 이 자리를 둘러싼 붕당 간 경쟁 치열 |
- 정파적, 학파적 성격
- 정치 참여층 증가. 정치 참여 폭도 확대.
- 정당의 독주 방지, 정치 세력 간 비판과 견제
=> 학연, 지연과 연결되면서 자기 붕당의 이익 추구로 폐단
=> 양반 수는 날로 증가, 관직수는 제한 -> 관직 쟁탈전
[붕당 정치 전개]
1. 선조(1567-1608)
- 동인과 서인의 분당: 이조 전랑직을 두고 김효원 vs 신의겸 다툼
=> 동인이 우세
- 북인과 남인의 분당: 정여립 모반 사건(기축옥사 1589)을 계기로 송강 정철이 정여립 모반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
=> 동인계열의 인사들을 사사하면서 동인의 미움을 받음
=> 이후 정철이 건저문제(세자책봉문제)로 선조의 미움을 받아 양사에 의해 탄핵 (실질적으로 갈라진 계기)
=> 정철의 처리 문제로 동인이 강경파인 '북인'(이신해)과 온건파 '남인' (유성룡)으로 분열
=> 임진왜란 전까지 남인이 정국을 주도
-임진왜란 후 북인 주도
=> 임진왜란 때 광해군과 함께 의병활동을 주도. '정인홍', '곽재우', '김면'등 수많은 의병장 배출
=>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북인은 전쟁의 책임을 물어 '유성룡' 중심의 남인 정권을 퇴진
- 북인 정권의 분열
- 중앙 정계 기반도 약하고 북인에 대해 우호적이던 '이항복', '이덕형' 등 인사를 정승으로 내세움
- 학연 지연에 있어 순수성이 매우 약함
=> 이후 북인은 '대북'(이산해 계열)과 '소북'(영창대군 지지, 유영경 계열)으로 분열
=> 대북은 다시 홍여순의 권력 확장과 관련해 '육북'(이산해 계)과 '골북'(홍여순 계)로 분열
=> 이후 선조 말기 광해군의 국왕 즉위를 둘러싸고 소북은 '청(소) 북'(남이공 계)과 '탁(소) 북'(유영경 계)로 분열
=> 탁북은 영창대군의 세자 옹립을 지지하며 서인과 결합해 일시적으로 대북을 축출
=> 대북은 광해군 즉위와 함께 다시 정권 장악
2. 광해군(1608-1623)
- 영창대군 옹립하려던 유영경, 등 소북의 계획 실패로 광해군 즉위
=> 광해군 지지하던 이산해, 이이첨 등 대북이 권력 장악
-칠서 사건: 대북의 미약한 정권 유지 목적으로 칠서 사건(영창대군 옹립운동)을 의도적으로 확대
=> 칠서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발전시켜 영창대군을 사사(1614)하고 인목대비 폐위를 단행(1618)
- 광해군 치적
+전후 복구사업: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해 양전사업 실시, 대동법 시행
=> 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, 경희궁, 인경궁 증축과 개축과정에 백성 부역에 동원으로 민생 피폐
=> 왕권 안정을 위해 파주 천도 시도 => 실패
=>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인구감소 해결 위해 '동의보감' 간행
=> 민생안정과 교화 목적으로 충신과 열녀 등 수록한 '동국신속삼강행실도' 간행
(성리학적 질서 강화 위해 사회질서 바로잡고 광해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목적)
+중립 외교(실리외교)
후금의 건국: 임진왜란 때 왜군 격퇴하는 과정에서 만주 지방 방비가 허술해지자 이 틈을 노려 후금이 성장
명의 원군 요청: 후금은 명에 대해 전쟁 포고. 명은 후금을 공격하고 조선에 원군 요청(1616)
광해군의 실리 외교: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은 신중한 중립적 외교정책으로 대처.
중립외교 결과: 후금의 침공을 예방함으로 왜란 후 복구 사업에 크게 기여
+인조반정(1623) (폐모가 가장 큰 원인)
원인: 서인이 영창대군 살해+인목대비 유폐를 근거로 광해군의 부도덕성을 전면으로 비판
=>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던 과정에 토목공사에 농민울 무리하게 동원
=> 국가 재정 악화
=> '이귀', '김자점', '최명길' 등 서인이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빌미로 반정을 단행
(인빈 김 씨의 3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 이종 후에 '인조'가 왕에 옹립)
결과: 서인이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몰아내고 권력 장악
=> 이후 북인은 철저히 위축되어 다신 중앙 정계에 등장하지 못함
=> '이이첨', '정인홍'은 죽고 광해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되다 제주도에 유배되 인조 19년에 사망
영향: 서인이 집권+ 남인의 견제하는 정국이 형성
=> 붕당 정치가 더욱 발전
3. 인조(1623-1649)
- 서인정권: 일부 남인과 연합, 서로 학문적 입장을 인정+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 유지 (붕당정치 활발)
-붕당정치 전개
=> 공론 형성: 서원을 중심으로 정치적 여론 형성, 자기 학파 관리를 통해 중앙 정치에 반영
=> 산림 강화: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 높은 인물이 재야에서 여론을 주재 (각 붕당의 사상적 중심이 됨)
-친명배금 정책: 광해군의 중립 외교 비판, 존화주의적 명분론(재조지은)에 입각해 명에 대한 의리 주장
-전쟁 발발: 후금의 두 차례 침공으로 다시 전란 시작 -> 정묘호란, 병자호란
-서인 정권의 병권 장악: 후금과 항쟁 중 '어영청', '총융청', '수어청' 등 (군대조직)이 설치
4. 효종(1649-1659)
-서인정권: 인조 대와 같이 서인이 집권+남인 견제
=> 산림 영수인 '김집'을 이조판서로 임명, 김집은 제자 '송시열' , '송준길'로 하여 친청세력인 '김자점'을 탄핵
=> 김자점은 효종과 송시열, 송준길을 반청 세력으로 '청'에 고발
=> 조선의 탁월한 유교 정책으로 무마 -> 김자점은 광양으로 유배
-북벌론 전개
=> 청을 정벌해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을 대신해 복수하자는 주장
=> 송시열, 송준길, 이완 등 중심으로 어영청을 근거지로 군대의 양성과 훈련, 성곽보수 등 북벌 준비
=> 네덜란드인 '하멜' 등의 표류해 그들의 과학 지식을 이용해 조총, 화포 등 신무기 개발
결과: 궁핍한 국가 재정+미약한 왕권
=> 불벌론 현실적으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서인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
-나선 정벌
=> 북벌 운동이 한창일 때 러시아 세력이 밀려옴
=> 위협을 느낀 청은 정벌군을 파견, 조선에 원병 요청
=> 변급, 신유 등 지휘관으로 하여 군대 파견
-대동법 확대
=> 민생 안정, 농민의 유망 방지 목적으로 '김육'의 주장으로 대동법 확대
=> 김육, 이시백 중심의 대동법 지지하였던 '한당' vs 김집 , 송시열, 송준길 등 대동법 비판하던 '산당'으로 서인이 분파됨
-기해독대(1659)
=> 효종이 송시열을 만나 북벌의 필요성을 강조
=>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구체적 대안도 제시되지 못한 채 3개월 만에 효종이 급서함으로 북벌운동 좌절
5. 현종(1659-1674)
- 북벌 논쟁: 서인은 계속 불벌론 주장
=>이 과정에서 선진 문물을 수용하자는 남인의 북학론과 대립
-예송 논쟁
원인: 효종 승하 후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색 문제가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 문제로 확대되면서 발생
경과: 1차 예송(기해예송 1659)에서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
2차 예송(갑인예송 1674)에서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
결과: 남인이 우세하며 서인과 공존하는 정국은 숙종 초에 일어난 경신환국까지 계속
* 기해예송: 서인(1년) vs (남인3년) 왕사동례(보편성) 왕사부동례(차별성) -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면서 '주자가례'에 따라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야한다 주장. 그래서 자의대비는 1년간 상복 입어야 한다 주장 -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며 효종은 임금이기에 자의대비는 3년간 상복입어야 한다 주장 =>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 서인이 정권 유지 *갑인예송: 서인(9달) vs 남인(1년) - 효종 비(인선대비) 사망 시 서인은 같은논리로 상복 착용기간을 9개월 주장 /남인은 '국조오례의'를 바탕으로 1년 주장 =>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 남인이 주도권 장악 |
[붕당정치 특징]
- 초기 '군자소인론'을 바탕으로 자기 붕당을 군자당이라 하고 상대 당을 소인당이라 비판
=> 사림이 물러간 이후 '양시양비론' 바탕으로 모두 군자당으로 봄
=> 이때부터 상대당에 대한 견제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붕당 정치가 전개
-공론 중시: 임진왜란 후 '비변사'를 통해 공론이 수렴됨. 공론의 주재자로 '산림' 출현, 3사 및 이조전랑의 정치적 비중 증대
-서원과 향교의 강화: 서원이나 향교가 재야 사족들의 이견을 수렴하는 통로로 확산
-한계: 붕당의 공론이 '민의'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의견 수렴에 그치는 한계